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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빛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데뷔작

category 영화 2017. 7. 11. 23:57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름다운 데뷔작

  '환상의 빛'은 고래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호평과 함께 각 종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고 수상도 했다.

  주인공 유미코(에스미 마키고)는 3개월 된 아기와 어린 시절 동네 친구이자 남편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선 남편이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유서 한 장 없었다. 

  7년의 시간이 흘러가고 유미코는 타미오(나이토 타카시)와 재혼한다. 남편의 딸, 시아버지와도 잘 지내며 유미코는 보통의 날을 살아간다. 그러다 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예전 동네에 찾아갔다가 전남편 이쿠오의 죽음을 떠올린다. 다시 돌아온 바닷가 집에서도 이쿠오의 알 수 없는 자살에 대한 기억으로 점점 더 마음이 괴로워진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무엇이 그를 기차로 뛰어들게 했을까? '있지 나... 난... 정말 모르겠어...'라고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내뱉는 유미코의 울음 섞인 한마디는 7년이 넘는 시간동안 마음 속 깊이 눌러 두었던 유미코의 슬픔과 괴로움의 표출이었다. 남겨진 자의 한이었다. 

하늘에-한-점-빛이-번지는-풍경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

  

  영화 <환상의 빛>의 줄거리는 특별할 것이 없다. 대사도 많지 않다. 시종일관 담담하고 조용하다. 남편의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지만 그조차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충격만 남긴 채 시간이 흘러간다. 그래서 처음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이 영화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의 장면들이 곱씹어지면서 이런저런 감상들이 떠올랐다. 

  마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 나오는 가고시마 명물 '가루칸'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루칸은 처음 먹으면 밍밍해서 아무 맛도 안 나는 것 같다. 하지만 씹으면 씹을 수록 은은한 단맛이 난다.

  영화 <환상의 빛>도 처음 봤을 때는 뭔가 심심하고 알 수 없는 영화였다. 그런데 한 장면 한 장면 천천히 다시 떠올려보니 쓴맛, 단맛, 짠맛 등 여러 가지 맛이 은근히 묻어나는 영화다.

담담한 카메라의 시선

  <환상의 빛>을 보고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것은 '카메라의 시선'이었다. 인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모든 것을 관망하는 시선. 이런 카메라의 시선 덕분에 고요하게 인물들의 생활을 관찰하는 관조적인 느낌을 영화 내내 받았던 것 같다.

  영화 초반 할머니가 집을 나가자 그 뒤를 쫓아 어두운 골목을 달려 나가는 유미코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멀리서 지켜본다. 유미코를 따라 달리지도, 달리는 유미코의 정면을 비추지도 않는다. 골목 끝에서 왼쪽으로 꺾어 빛 속으로 유미코가 사라질 때까지 그저 지켜본다.

  이런 장면은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재혼한 남편인 타미오가 바닷가에서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누나가 주위를 뛰어다니는 모습도 바다 가운데서 지켜보는 것처럼 멀리서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 장례행렬 뒤를 따르는 유미코의 모습도 아주 작은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카메라는 멀리서 지켜본다.

  한 발짝 떨어진 카메라의 시선으로 유미코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보면서 관객은 삶의 관찰자가 된다. 그리고 조금은 담담해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남편의 자살 같은 충격적인 사건도, 누군가의 부재로 안절부절 걱정하는 시간도 나의 일일 때는 담담해질 수가 없다.

  가까울수록 슬픔과 괴로움의 감정은 실제보다 더 증폭된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답을 찾으려 한다. 유미코가 전남편의 자살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괴로워하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그런데 조금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면 남편 타미오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하지만 설령 인과관계가 있다고 해도 끝내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죽음뿐만 아니라 생명의 시작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삶은 설명할 수 없는 시간과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시간과 사건 속에서 분명한 하나는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답을 꼭 찾지 못해도 삶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유미코처럼 예전에 풀지 못한 문제로 문득문득 아플 수는 있지만, 너의 탓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담담한 위로에 삶을 또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유미코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환상의 빛>의 관조적인 카메라 시선은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볼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 출연 : 에스미 마키코(유미코), 나이토 타카시(타미오), 아사노 타다노부(이쿠오) 
  •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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