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첫째 아들의 기일에 집에 모인 한 가족의 1박 2일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속도감 있는 전개도, 긴장감 넘치는 반전도 없는 어찌 보면 심심한 영화이지만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후기
부엌에서 엄마가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 설거지하는 그릇소리, 물소리, 마당을 뛰어다니는 아이들 소리 그리고 고향 마을의 풍경을 배경으로 흐르는 조용한 기타 소리는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게 하는 주문같이 들린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 사실도 잊고 마치 나도 그 집에 함께 있는 가족의 한 사람이 된 듯하다.
<걸어도 걸어도>는 잔잔한 영화지만 중간 중간 묘한 긴장감도 준다. 가족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서로 생각지 못한 틈을 문득문득 발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니 치사한 것 같고, 말 안하고 넘어가자니 은근 서운한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할머니 집'이 좋다는 아이들 말을 멀리서 듣고 문을 쿵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할아버지. 딸을 불러 왜 내가 일해서 마련한 내 집을 아이들이 할머니 집이라고 하느냐며 결국은 한 소리를 하신다.
꿍해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이 같아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키득키득 소소한 웃음에 방심하고 있을 즈음 영화는 섬뜩한 엄마의 미소를 보여준다.
큰 아들은 바닷가에서 한 아이를 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아이(요시오)는 해마다 아들의 기일에 찾아온다. 요시오 군도 괴로워하는 것 같으니 이제 기일에 그만 부르자는 둘째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그래서 부르는 거야."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에게 1년에 한 번쯤 고통을 준다고 해서 벌 받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계속 오게 만들 거야."
현관에서 무릎을 꿇고 사람들을 배웅할 만큼 친절하고, 늘 재미있는 말과 웃음으로 밝던 엄마 마음의 그늘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알던 엄마와 다른 모습에 둘째 아들도 관객도 엄마에게서 묘한 틈을 느낀다.
틈으로 살짝 보인 엄마의 진심은 낯설지만 그 또한 엄마의 마음이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이 어찌 늘 평온할 수 있었겠는가. 엄마도 사람이고 하나의 감정만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겉으로는 괜찮은 듯 담담히 이야기하고 지냈지만 엄마도 참 많이 괴로워하고 슬퍼하셨다는 것을 틈에서 발견한다.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엇갈린 기억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내가 믿어왔던 사실이 진실이 아님을 알았을 때, 오해해온 긴 세월이 허무해지는 순간이 있다.
서운할까봐 아파할까봐 혹은 미워서 쑥스러워서 미안해서 미뤄왔던 이야기 속에서 가족들의 진심을 발견하면 늘 후회하게 된다. 걸어도 걸어도 가족의 마음에 닿는 것은 늘 한 발씩 늦는다. 둘째 아들의 말처럼.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
영화 <걸어도 걸어도> 기본 정보
-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 출연: 키키 키린(토시코), 아베 히로시(료타), 나츠카와 유이(유카리), 하라다 요시오(쿄헤이)
- 영화 <걸어도 걸어도> 다시보기 : 넷플릭스 / 웨이브 /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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