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준 작가의 드라마 '박성실 씨의 사차 산업혁명'은 AI 상담원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놓인 상담원 박성실 씨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AI가 보편화될 미래에 인간은 어떻게 생존해서 AI와 공존할 수 있을까. 편리한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마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불시에 느껴지는 서늘한 공포를 경험하게 한다.
tvN '드라마 스테이지'에서는 CJ ENM의 신인 스토리텔러 공모전 오펜(O'PEN)에서 당선된 단막극 10개 작품을 공개한다. 2021년에는 '우리에게 곧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주제로 신인작가들이 우리에게 곧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박성실 씨의 사차 산업혁명'은 그중 하나이다.
AI vs 인간
AI 아나운서가 뉴스를 전하고, 서빙 로봇이 음식을 나르고, 바리스타 로봇이 커피를 만드는 세상에서 박성실 씨(신동미)의 하루가 시작된다. 퓨처 앤 라이프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성실 씨는 10년 동안 무지각, 무결근으로 근속상도 받았다. 그런데 퇴근을 한 시간 남긴 오후, AI 상담원 도입으로 상담원 90%를 해고한다는 회사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박성실(신동미)과 동료 이혜영(배해선), 최미연(허영지)은 이번 해고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3개월 평가 후 VIP 담당 소수 상담사만 남긴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3개월 후 박성실 씨와 동료들은 AI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계속 출근할 수 있을까?
대본, 연출, 연기 삼박자의 조화
'박성실 씨의 사차 산업혁명'은 대본, 연출, 연기가 조화를 이룬 알찬 단막극이다. 특히 해고 통보 장면은 셋의 조화를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다. 시계가 16:59:59에서 17:00:00으로 바뀌자 콜센터에 있는 모든 직원의 휴대폰에 메시지 알람이 울린다. 불안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음악과 함께 시간이 정지한 듯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멈춰있다.
이상함을 느낀 박성실 씨도 문자를 확인하려는데 컴퓨터 모니터에 긴급공지창이 뜬다. 무거운 사무실 분위기와는 달리 경쾌한 목소리의 AI가 금일 상담원 90% 인원감축 공지를 알린다. 멈췄던 사무실의 시간이 흐르고 상담 전화벨이 여기저기서 바쁘게 울린다. 박성실 씨도 떨리는 손을 마우스로 겨우 옮겨 상담전화를 받는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 박성실 씨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떨리는 입 꼬리를 올리며 외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정갈하고 밝은 사무실, 경쾌한 AI 목소리, 웃고 있는 입과 대비되는 멈춰버린 사람들, 어두운 음악, 눈물 고인 눈. 서로 반대되는 것의 '대비'로 박성실 씨의 충격, 공포, 슬픔, 비참함이 더 증폭되어 전해진다. 갑작스러운 부당 해고 통보로 멍해진 상황임에도 전화를 받으면 지난 10년 동안 성실히 해온 것처럼 '사랑합니다, 고객님'을 자동으로 외치는 웃픈 상황이 비극을 더 아프게 한다.
씁쓸한 아이러니
AI는 월급, 복지도 요구하지 않고, 아프지도 않는다. 퓨처 앤 라이프 회장 입장에서는 인간 상담사보다 AI 상담사를 두는 게 돈을 아낄 수 있는 길이다. 때문에 박성실 씨와 동료들은 AI보다 더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것은 성취감을 주기도 하지만 비참함을 불러오기도 한다. 나를 증명할수록 내가 사라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성실 씨는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싶어서 친한 동료의 실수를 은근히 바라기도하고, 부담감에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하고, 고객이 혹시라도 불만 접수를 할까 봐 안절부절 더 낮은 자세로 연신 사과를 한다. 상황이 만들어낸 을의 비참함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자존감을 깎고 또 깎는다.
박성실 씨와 동료들이 고군분투하는 동안 퓨처 앤 라이프 회장실에서는 장인이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만든 양복을 입은 회장이 직접 원두를 갈아서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는 역시 사람 손으로 내려야 제 맛이 난다며. 마치 실리콘밸리의 스마트폰 개발자들이 정작 자기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드라마 스테이지 2021의 주제 '우리에게 곧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인간의 일자리를 AI가 모두 대체하는 날이 머지않아 진짜 올지도 모른다. 그 미래에 우리는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말에서 박성실 씨의 어린 아들의 질문과 퓨처 앤 라이프 회장의 물음에 멍해지던 정신이 번쩍 든다.
연출 박지현, 극본 송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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