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교수는 고교 시절에 니체의 책을 읽고 감명 받아 60세가 넘은 지금까지 니체를 연구하고 포항공과대학 석좌교수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질문해서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는 니체처럼, 그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는 삶의 태도를 실천하고 있다. 세바시 강연에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를 '극단의 시대'로 정의한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극단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는 '균형의 힘'을 강조한다. 많은 학자들도 탐욕의 시대에서 중용과 절제의 시대로 가기 위해서는 도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극단의 시대에 필요한 '도덕'은 무엇일까? 극단의 시대,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정리가 먼저 필요하다. 이진우 교수는 네 가지 명제를 이야기한다.
첫째, 자본주의는 극단을 추구한다. 자본주의는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극단의 징후들로는 이념갈등, 자본주의, 쾌락주의가 있다.
둘째, 시장은 중도를 배척한다. 시장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교환이 일어나는 탐욕의 문화 공간이다. 플라톤은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플레오넥시아'라고 명명하며 경계해야한다고 말한다. 시장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며 두 가지를 요구한다. 첫 번째는 변화에 적응하는 '유연성'이다. 새로운 기술, 제품, 문화, 가치를 만들고 여기에 따라 변화해야한다고 부추긴다. 이는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사람들에게 유발한다. 두 번째는 '리스크'의 일상화다. 성공하려면 리스크를 감당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퍼뜨리며 리스크 일상화가 발생한다. '머무르는 것은 퇴보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시장에 만연하다. 이러한 모습을 "자본주의 사회란, 절제와 중용을 상실한 사회. 과잉과 과도의 평범화."라고 이진우 교수는 정리한다.
셋째, 극단은 중도를 요구한다.
넷째, 중용은 균형의 힘이 필요하다. 중용을 위해서는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모든 이가 모든 것에 중도를 이루는 것이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답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고 이진우 교수는 말한다. 중도의 역설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중도의 역설>
1. 중도는 안정을 가져온다.
2. 안정의 절대화는 삶을 지루하게 만든다.
3. 모든 것이 중도이면, 중도를 알 수 없다.
4. 중도가 계속되면 극단을 요구한다.
중도는 양 극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균형의 힘을 갖추고 있다면 어떤 상황에도 의연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미쳐서 자신의 생각이 극단에 위치할 때도 있다. 미치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은 극단은 나쁘다, 중간으로 가야한다는 물리적인 중도가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다르고 내 주장은 타당한지 돌아보는 '균형의 힘'이다. 내가 극단에 있더라도 다른 곳의 소리를 듣고 볼 수 있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여기서 생각하는 힘, 철학의 필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주어진 환경과 상황의 변화에 휩쓸려가기 보다는 끊임없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스스로 정해야 한다. 책 <지적자본론>에서 마스다 무네아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수단과 목적을 착각하는 이유는 그쪽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지속적으로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다. 그래서 무의식중에 간단히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금전 쪽으로 목적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시장이 무엇인지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길인지 생각하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처럼, 질문하지 않으면 진짜 나는 사라지고 사회가 만든 나만 남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바시 강연은 시대의 흐름 속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기 위한 '균형의 힘',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