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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은 다시 찾아온 패권투쟁의 시대에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패권교체기 생존의 길을 찾아 보려한다.

  청의 건국자인 누르하치가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에 패한 뒤 사망하고, 홍타이지는 청나라 2대 황제로 등극한다. 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수군을 조선에 요청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당시 조선은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의 수군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이 진압될 위기에 처하자 반란군은 수군과 함정을 이끌고 바다로 도망간다. 그리고 홍타이지는 명나라 반란군 포섭에 성공한다.

  명나라는 조선에 도움을 요청한다. 동시에 청나라에서도 포섭한 명의 반란군에 대한 식량지원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온다. 조선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당시 조선은 인조반정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인조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완전히 부정했다. 정권의 정통성을 명나라의 승인에서 찾았기 때문에 '숭명배금'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배금은 슬로건이지 실제로 후금과 군사적 충돌을 하거나, 명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숭명배금'은 인조정권의 정치적 정당성과 권력유지를 유한 슬로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약소국의 중립을 좋아하는 강대국은 없다. 세계 1,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벨기에는 중립을 외쳤다. 그러나 벨기에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소국은 전쟁의 길목이 되었다. 교묘한 외교적 능력과 강력한 자기 방어 능력이 있어야 중립도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결국 조선은 선택을 해야 했고, 명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후금()의 요청은 거절한다.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 후 몽골을 정복하고 국호도 청으로 바꾼 홍타이지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홍타이지 즉위식에 참석한 인조 정권의 사신들은 인사를 하지 않았다.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인정하고 있던 인조정권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황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들을 살려서 조선으로 보내지만, 전쟁이냐 굴복이냐는 최후통첩도 함께 보낸다.



  인조는 살아 돌아온 사신을 유배 보냈고, 병자호란의 서막이 오른다. 당시 대명 사대론자의 명분론을 뒷받침한 것은 '중화주의'였다. 중화주의는 중국을 중심에 두고 주변을 야만으로 보는 이분법이다. 이는 다른 사회를 습관적으로 타자화하는 문제점이 있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은 미국과 중국을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편견은 평화적인 외교 노력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결과를 이미 아는 역사적 사건을 볼 때는 그 당시 놓쳤던 것들이 잘 보인다. 지나고 보니 미숙했던 외교 전략이라든가, 고려하지 못한 요인들이 쉽게 판단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모든 것에 확신을 할 수가 없다. 오늘날 한반도에 닥친 외교적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현명한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고, 조금이라도 후회를 덜 남기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에 지난 역사를 살피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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