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장준환
출연 : 김윤석(박처장), 하정우(공안부장), 유해진(한병용), 김태리(연희), 박희순(조반장), 이희준(윤상삼 기자), 설경구, 강동원, 여진구.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이 조사를 받다 고문으로 사망한다. 같은 해 6월,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전두환 정권의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다. 학창시절 근현대사를 배울 때 이 두 사건의 순서를 묻는 문제가 시험에 꼭 나왔다. 교과서를 통해 접한 80년대 대학생들의 시위와 죽음은 먼 어른들의 이야기 같았다. 그런데 영화 <1987>을 보면서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보였다. 한참 어른으로 느껴졌던 대학생들은 실은 냉혹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상처받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순서를 외우느라 바빴던 80년대의 민주항쟁 사건들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 <1987>은 87년도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 그런데 하정우는 어디 갔지?' 영화 <1987>이 막바지로 갈 때 즈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반 박종철의 시신을 화장해서 증거를 인멸하려던 이들의 요청을 강하게 거부했던 최 검사(하정우)가 어느 순간 영화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영화 <1987>에는 주연급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는데 영화에 계속 나오는 사람은 절대 악 박처장(김윤식) 뿐이었다. '주인공이 없는 영화라니... 신기하네... 왜지?' 영화 속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진실, 변화를 위해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이는 장면을 보면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영화 <1987>에서도, 역사 속 1987년에서도 단 한명의 영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사회의 변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며, 부당함과 부조리에서 오는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이루어졌다. 화장동의서 날인을 거부하고 원칙대로 부검을 밀어붙인 검사, 진실을 집요하게 파고든 기자, 자신이 목격한 부당함에 눈감지 않은 시민과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행동이 연결되고 모여서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시작할 때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아닌 우리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가능한지. 그래서 영화에서 연희처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라고 묻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 모른척할 수가 없다는 영화 속 선배의 말처럼 외면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를 모으니 광장을 채우는 큰 울림이 되었다. <1987>을 보면서 독립운동을 다루었던 영화 <암살>도 생각이 났다. 매국노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는 물음에 안윤옥(전지현)은 말한다. "그치만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 역사는 알려주는 것 같다. 변화는 특별히 용감하고, 특별히 정의롭고, 특별히 강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행동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