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능력이 노동력 상품으로 거래되는 것의 가장 큰 위험은 '인권'이 상실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 자체를 물건화하여 사고파는 제품처럼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아이들을 일꾼으로 사고파는 모습은 노동력이 상품화 되었을 때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노동력 상품화의 위험
아이들은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그저 노동능력에 따라 가격이 매겨져 이곳저곳으로 팔려다니 게 된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의 경우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돈에 눈 먼 어른들에게 이용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아프리카와 같이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나라의 국민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많다. 이런 기업들에게 노동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늘려줄 수단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인권에 대한 배려는 없다. 노동자들의 인권이 무시될수록 기업은 인건비를 줄여 이익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해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회사의 제품을 구입하자는 운동으로 공정거래상품 구입하기 운동까지 생겨나고 있다. 또한 인간이 상품화 되면서 인신매매 같은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사회 이치에 밝지 않은 약자들은 매매의 표적이 되어 범죄의 희생자가 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영국 빈민법
<올리버 트위스트>를 보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올리버 같은 어린 아이들을 비롯하여 여성 등 약자들의 사라진 인권과 영국 빈민법의 모습이었다. 영국 빈민법이 안타까웠던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복지의 근간이라고 할만한 정신이 과연 있는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영국의 빈민법은 빈민을 위한 법이 아니라 그저 빈민을 대상으로 한 법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빈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진 법이라기보다는 빈민들로 인해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그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지자 지배층의 입장에서 이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빈민법을 만든 것 같았다.
올리버처럼 부모가 없고 어려서 노동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구빈원에 머물렀는데 아이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아놓고 노동능력이 생기면 돈을 받고 팔아버리는 모습에서 마치 가축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재산을 늘리기 위해 가축을 기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요부양아동을 보호한다고 관리자들은 엄청난 봉사자인듯한 태도를 보이지만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은 수용소와 같았다.
엘리자베스빈민법은 빈민구제를 정부의 책임으로 인식하고 세금으로 빈민을 구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사회복지의 출발점이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때 정부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정부였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없는 지방정부는 구빈세를 부과했는데 구빈세에 따라 빈민들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달라지다보니 복지이주문제가 발생했다.
세금을 내는 귀족세력들은 이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빈민들의 이주를 제한하는 정주법과 같은 제도도 생겨났다. 봉건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구 지배세력인 지주들은 임금을 통제해야했고 노동력의 이동은 임금상승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노동력의 이동을 금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스핀햄랜드법은 원외구제를 실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최저소득보장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빈민법은 놀고 먹는 자들을 돕는 것처럼 인식되고 구빈세 부담을 증가시켰다.
그리고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자본가들에게 힘이 실리는 사회 변화 속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가들은 정주법이나 중상주의적 구빈정책의 철폐를 주장하면서 신, 구 지배세력이 대립하게 된다. 신빈민법에서는 작업장 활용의 원칙, 열등처우의 원칙 등을 내세우면서 노동력의 상품화가 더욱 가속화 되었다.
결국 빈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세력들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빈민법은 노동력의 상품화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게 되었다. 애초에 빈민법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은 빈곤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생활을 보호하는 데 문제가 될 수 있는 빈민들을 통제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빈민들의 생활이 나아지기 힘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봉건사회에서는 지주들이 생산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고, 봉건사회가 무너질 때는 새로운 지배세력인 자본가들이 그들의 산업을 위해 노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빈민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신, 구 지배세력 사이의 이권다툼, 갈등 속에서 빈민법의 주체가 되어야할 빈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에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기에 여전히 힘든 상황을 견뎌내기만 할 뿐이었다.
21세기 올리버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영화 <모던 타임즈>의 마지막 장면이 이들의 상황과 겹쳐진다. 당시 영국사회의 빈민들이 빈민이 된 것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와 지배세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빈민들이 아무리 채플린처럼 웃음을 잃지 않고 도전하고 또 시도해본들 어려운 상황이 쉽게 나아지기 힘들 것이다. 사회가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고 진정 빈민들을 위하는 정책을 펼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들이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과거 영국의 빈민들, <모던 타임즈>의 채플린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노력을 받아들여줄 사회구조와 정책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면 우리도 21세기의 올리버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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