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짧은 구절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명쾌함에 놀랍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그렇게 부른다는 것은 그것을 그 이름으로 규정짓고 한정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진 것은 이래야만 한다는 생각의 틀이 씌워지고 우리는 이를 고정관념이라 부르기도 한다. 혹시 다른 이름을 붙였다면 다른 이미지로 우리에게 인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름 붙이지 않았다면 규정지을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름 지어지지 않았을 때 오히려 그것은 가장 제대로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를 도라고 부르지 않고,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여 부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식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야 비로소 한 송이 꽃이 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약속한 것처럼 같은 것으로 부르지 못할 뿐 이미 알고 있고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도라고 하는 순간 저런 것은 도가 아닌 게 된다. 그것은 무한히 존재하는 도를 한정하고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진정한 도라고 할 수는 없다. 도를 도라고 부르는 순간 도의 본질을 모두 말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도를 도라고 부르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도를 알고 느끼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도는 도로써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름의 한계를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