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증을 가진 웬디 (다코다 패닝)의 일상은 규칙적이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고, 샤워하고, 요일별로 정해진 색깔의 스웨터를 입고, 시나몬 가게에 아르바이트를 가고, 지내고 있는 센터에서 선생님과 눈 맞춤 수업을 하고, 강아지 피터를 산책시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잠자리에 든다. 똑같은 하루하루 속에서 웬디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스타 트렉> TV시리즈를 보고 글을 쓸 때이다. <스타 트렉> 덕후인 웬디는 상금 십만 달러가 걸린 '스타 트렉 시나리오 공모전'에 참가하기 위해 400페이지가 넘는 시나리오를 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우체국에 가야 하는 날을 놓쳐버린다. 마감일까지 시나리오를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웬디가 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LA 파라마운트 픽처스까지 600km를 직접 가는 것뿐.
"어떤 일이 있어도 마켓 가는 못 건너"
600km는 누군가에게는 비행기를 타면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간단한 거리다. 하지만 자폐증을 가진 웬디에게는 엄청난 모험이다. 매일매일 규칙에 따라 정해진 길로만 다닌 웬디에게 익숙한 길 밖의 세상은 불안하고 위험하다. 그래서 평소에 복잡한 마켓 가 근처를 지날 때면 "어떤 일이 있어도 마켓 가는 못 건너"라고 스스로 주의를 주며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런데 LA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마켓 가를 건너야만 한다. 자신의 안전지대인 컴포트존(comfort zone)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입니다."
웬디가 선생님이 세워준 규칙을 성실히 따르며 컴포트존을 지킨 이유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자폐증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돌보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면 사진으로만 봐온 조카가 있는 언니네 집에서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타 트렉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하는 것도 스타 트렉과 글쓰기가 재미있는 이유도 있지만 상금을 받으면 언니에게 부담 주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꿈을 위해 지켜온 컴포트존인데, 꿈이 컴포트존 밖에 존재한다면? 웬디는 자신의 시나리오 속 대사에서 답을 찾는다.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입니다” 그리고는 컴포트존 밖으로 전진한다.
"사람들에게 이용당해서는 안 돼"
인정하려니 조금 씁쓸하지만 어른들이 뭘 하지 말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선생님이 정해진 규칙을 지키며 컴포트존에 머물라고 한 이유를 웬디는 실감한다. 자기 일로 바쁜 사람들은 웬디에게 친절할 여유가 없다. 게다가 세상물정 모르는 웬디를 간파하고는 물건 값을 부풀려 사기치는 점원, 호의를 베푸는 척 접근해서 돈과 아이팟을 훔쳐가는 소매치기까지 만난다. 이런 나쁜 사람들을 만나서 나쁜 일을 당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에 어른들은 ‘안 돼’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다.
하지만 사기 당하는 웬디를 구해주며 "아가, 사람들에게 이용당해서는 안 돼"라고 알려주는 할머니, 겁에 질려 도망가는 웬디가 스타 트랙 덕후인 것을 알고 스타 트랙에 나오는 '클링온어'로 대화하며 안심시켜주는 경찰관도 만난다. 상처도 도움도 받으면서 웬디는 세상 사람들과 교감하고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정해준 규칙 속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던 아이에서,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도 발휘하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컴포트존 밖으로 전진
컴포트존 바깥은 위험하다. 하지만 불안과 불편을 겪으면서도 한 발씩 전진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고마운 인연과 행복도 만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도 몰랐던 새로운 자신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마켓 가는 못 건너'라며 늘 같은 길로만 다니던 웬디가 600km 떨어진 LA에 혼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웬디의 성장을 보면서 나에게 마켓 가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못한다고 혼자 정해버린 정지선이 있다면 올해는 살짝 한 발 넘어가 봐야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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